일상&잡담

전문성이란 무엇인가 ?

Yuniverse. 2024. 10. 26. 17:10
전문성은 나의 시간을 대가로 얻어낸 타인의 인정이다.

 

 전문성을 갖추고 싶다고 말만 하면서,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던. 

 스스로에게서 문제와 해결책을 찾지 않고, 외부에게서 문제와 해결책을 찾았던. 

 지금도 많이 부족하지만, 지금보다도 훨씬 부족했던 과거의 저에 대한 회고글입니다. 


 

회사 내에서의 연차가 쌓일수록, 맡은 일이 하나둘 늘어갔다. 맡은 일이 하나둘 늘어갈수록, 스스로 느끼는 책임이 더 커졌다. 책임이 커질수록, 일을 더 잘하고 싶었다. 내가 맡은 일을 잘해내고 싶다, 이 일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잘했으면 좋겠다, 내가 한 일이 회사에 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가 한 결과물을 보면 자신이 없어졌다. 남들도 이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보완해야할 점들이 자꾸만 눈에 띄었다. 그 모든 게 나한테 전문성이 부족해서인 것 같았다「전문성」 , 그 마법같은 단어만 갖추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다.

 

 자, 그럼 전문성은 어떻게 갖춰야 하는거지? 전문성이란 게 뭐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대학원'이었다. 2년+α의 석박사 과정, 논문, 그리고 그걸 증명해줄 학위증. 그 학위증을 가지면 나는 전문성을 갖춘 인재가 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작년 말에 머릿속에 들어온 '대학원' 키워드는 마치 물에 떨어뜨린 잉크 한 방울처럼 퍼져 나갔고, 대학원이 유일한 정답이고 대학원을 안 가면 평생 전문성을 갖출 수 없을 것 같았다. 작년 1분기까지 수많은 대학원 모집요강서를 읽어보고 연구실과 컨택하는 노하우를 설명하는 영상을 찾아보고 '석사 출신'을 만나면 동경어린 눈빛과 함께 여러 조언을 구했다. 그러던 중 네트워킹 모임에서 만난 석사 출신의 연구원께서 내 말을 가만히 듣더니 질문하셨다.

 

👩‍💼: 유진님은 어떤 분야를 더 깊게 공부하고 싶어서 대학원을 생각하시는 거에요?

 

저요...? 저는 「전문성」 을 갖추고 싶어요. 무엇을 더 특별히 공부하고 싶은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제가 원하는 건 '전문성을 갖춰서 일을 잘하는 것'이에요. 내가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운 답변이었기에, 나는 차마 이 답변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런 나를 꿰뚫어보셨는지 연구원께서는 몇 마디 덧붙이셨다.

 

👩‍💼: 저는 명확히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있어서, 그 분야를 대학원에서 수없이 탐구하고 고민한다면 대학원이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뚜렷한 목표 없이 학위만을 위해서 간다면 오히려 마이너스인 측면이 크다고 생각해요.

 

너무나도 맞는 말이었고, 내가 얼마나 안일하고 얕게 생각했는지 깨달았다. 데이터분석가로써 일을 할 때마다, '의미'를 발견해내지 못하는 데이터는 단순히 숫자에 불과하다고 주창해왔는데 정작 나는 '의미' 없이 내 인생 플랜을 세우려고 하고 있었다. 외부 사람들에게는 맘껏 질문했으면서, 가장 중요한 나에게는 질문하지 않았다. 대학원에 가서 무엇을 더 깊게 공부하고 싶은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답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대학원 진학에 대해서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생각한 전문성 향상 방안의 key는 '시니어 리더의 존재'였다.

 

우리 회사의 데이터팀은, 사내 다른 부서들과는 다르게 생겨난지 그렇게 오래된 부서는 아니었다. CPO께서 회사 내에 데이터를 전문적으로 보는 팀이 있어야할 것 같다고 결정하신 뒤, 본인께서 리더를 맡으시면서 만든 팀이었다. 3년 전에 내가 이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데이터팀에는 나를 포함한 셋이 전부였고, 그 중 한 분은 CPO셨으니 어떤 느낌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과거의 나 자신을 굳이 깎아내리고 싶진 않지만, 정말... 일을 잘하진 못했다😅 데이터 수집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걸 며칠이 지난뒤에야 알아챈 적도 있고, 주중-주말 사용자의 특성이 다른데 그걸 고려하지 않고 분석해서 아예 일을 다시해야 했던 적도 있었고,.. 정말 다양한 실수를 저지르며 우당탕탕 일했다. "팀원이 역량 상 업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을 때는 리더가 해결해준다." 옳은 문장이라고 생각하지만, 리더가 CPO였기 때문에 이정도의 일까지 신경쓰게 하는 것이 많이 죄송스러웠다. 책임져야 할 범위도 회사 내의 권한도 맡은 업무량도 많은 리더였기에, '나'라는 사람 개인의 전문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안까지 상의하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데이터팀만의 리더를 원했다. 다른 부서도 함께 관리하는 것이 아닌, 우리 팀만 신경쓰는 리더가 있다면 그분이 해주는 피드백이 나의 전문성을 향상시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올해 2분기에 우리 팀에는 데이터 리드가 오게되었다.

 

CPO와 나눴던 대화의 일부. 리더도 나도 서로에게 죄송함을 느끼고 있었다.

 

 

새로 온 리더와 4개월 가량을 함께하면서 나는 아래와 같은 점들을 깨달았다.

  1. 리더가 해주는 피드백은 생각지못한 부분까지 고려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2. 하지만, 리더가 내 전문성 전체를 책임져주는 것은 아니다.
  3. 결국 내 전문성은 내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 나는 또 내가 해야할 일을 남이 해주길 무의식적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팀의 리더는 팀 전체를 신경써야 한다. 리더의 목표는 조직을 기존보다 더 높은 점수로 만드는 것이지, 한 명의 개인을 100점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개인이 100점이 되는 것은 개인이 해야할 일이다. 그 과정 속에서 조언을 구할 때 도움은 줄 수 있겠지만 리더가 먼저 나서서 "A를 하면 100점이 될 수 있을겁니다."라고 알려줄 책임은 없다.


 

나는 내가 직접 겪지 않고서는 깨닫지 못하는 인간이라, '나의 성장'은 전적으로 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 주위에 뛰어난 분들로부터 조언을 구할 수는 있겠지만ㅡ실제로 감사하게도 주변에 본인 일인양 성심성의껏 알려주시고 조력자가 되어주시는 멘토와 같은 분들이 많다.ㅡ 이는 어디까지나 도와주는 것이지 그걸 현실화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전문성은 도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발전시켜야 하는가?

고민이 해결되지 못하고 이어지던 중 동료들과 일러스트레이터의 전시를 보러가게 되었다. 그리고 전시를 본 이후 동료들과 의견을 나누면서 「전문성」 에 대해서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우연히 갔던 전시에서 해답을 얻었다.

 

디자인 전공이 아니었던 일러스트레이터

 

 

👩🏻(나): 작가 소개를 읽어보았는데, 작가님께서 건축학 전공이셨더라고요. 취미 활동이 작가님을 일러스트레이터로까지 만들었다는 게 눈길이 갔어요. 요새 '전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데, 전공이 전문성을 나타내는 시대는 확실히 지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 취미로 그린 일러스트가 인기를 끌었다는 게 키포인트인 듯해요. 저는 전문가라는 건 결국 남들이 인정해주는 칭호라고 생각하는데, 인기를 끌었다는 건 남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전문 일러스트레이터가 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 이거 공부하면 좋다, 저거 알면 좋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많잖아요. 사실 다 하면 좋겠죠. 공부해서 안 좋을 게 뭐가 있겠어요. 하지만 우리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저것들 중에서 무엇을 할지 정해야 하잖아요. 그 정하는 것에 의해서 어디에 전문성을 갖출 수 있는지가 결정된다 생각해요.

 

 

전시를 보고 집에 돌아와서 지금까지 고민한 것과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눈 것을 조합하며 나는 전문성을 이렇게 정의했다.

전문성은 나의 시간을 대가로 얻어낸 타인의 인정이다.

 

내가 잘하고 싶은 분야를 시간을 투자해서 공부하고 실행하여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치가 쌓였을 때, 그 지식과 경험치를 남들이 인정해줄 때, 나는 비로소 그 분야의 전문성을 갖추게 된다.

 

따라서, 애초에 "전문성을 갖추고 싶다"는 말부터가 완성되지 못한 말인 것이다. 무엇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고 싶은지까지 말해야 한다. 그래야 그 뒤의 액션이 나온다. 전문성을 갖추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나'는 무엇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고 싶은가?

 


 

[번외의 생각] 데이터 직군에 한해서는 "데이터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고 싶다" 또한 완성되지 못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터 학문의 범위는 너무 방대해서, 데이터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고 싶다는 말은 "나는 데이터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또는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릅니다"라는 말과 동일한 것 같다.

[번외의 생각2] '내가 아닌 타인의 인정'이면 무조건 OK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극단적인 예시로 부모님은 자식이 뭘하든 잘했다 해줄텐데, 부모님의 인정이 자식을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 만들지는 않을테니까 말이다. 결국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타인'은 '시장'으로 생각하는 게 제일 합리적일 것 같다. 내가 지금 하는 것들이 '시장'에서도 인정받는가, 시장에서 인정받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려하며 전문성을 키워나가는 게 필요하다.